“보이스피싱 당하면 돈은 못 찾는 줄 알았어요. 포기하고 있었는데 생일선물을 받은 느낌이었어요.”사업을 하던 ㄱ(49)씨는 2017년 연말 무렵 급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금리 27%로 3천만원의 대출을 받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은행 직원을 사칭한 보이스피싱범이 금세 대출 내역을 세세하게 읊으며 ‘지정된 계좌로 대출금을
상환하면금리 13%대 대출로 바꿔주겠다’는 전화를 걸었다. ㄱ씨는 “귀신에 홀린 듯” 아직 쓰지 않은 2천만원을
이체하고선 이상한 느낌이 들어 경찰에 신고했고, 대포통장에 돈을 넣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곧바로 지급정지를 요청했지만, 1500만원은 이미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500만원만 남은 상태였다. 든든한 아빠이자, 남편이었던 ㄱ씨는 가족들에게 말도 못한 채 돈을 갚기 위해 몰래 야간 대리운전, 주말 물류센터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해 겨울 가족들과 함께 가기로 했던 제주도 여행도 못 갔다. “하늘이 깜깜하더라고요. 아이들한테도 ‘보이스피싱 조심해라’라고 했는데 내가 당했으니.”광고
6년 가까이 지난 이달 11일, ㄱ씨가 경찰한테서 “잃어버린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전화를 받고선 ‘또 보이스피싱인가’하고 의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를 찾은 이튿날은 ㄱ씨의 생일이었다. 알고 보니 ㄱ씨의 피해금은 가상자산(암호화폐) 거래소에 묶여 있었다. 거래소는 직전 은행으로부터 피싱 범죄 피해금이 입금된 사실을 통지받으면 그 계좌를 동결하고 있지만, 정작 피해자에 대한 정보는 공유받지 못해 묶인 피해금을 돌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몇년 새 코인 가치가 올라 피해 원금의 2배가량인 3100만원을 받게 된 ㄱ씨에게 경찰은 “마음고생 한 대가”라고 했다. “소름이 확 돋더라고요. 평생에 남을 기억이에요.”광고광고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가상자산 거래소에 묶인 피싱 피해금 122억여원의 피해자 503명을 특정하고 9월 초부터 피해금을 돌려주고 있다고 27일 밝혔다. 가상자산 거래소에 묶인 피해금의 주인을 찾아 돌려준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경찰 조사 결과, 2017년 이후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5곳(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고팍스)이 피싱 범죄로 동결한 계좌는 339개, 묶인 피해금은 122억3천만원에 달한다. 최근 피싱 조직이 금융기관의 범죄수익 추적을 피해 가상자산 거래소를 거쳐 국외로 이전하는 경로가 일반화되면서다.광고
하지만 은행 등 금융회사의 경우 피해자의 정보 공유가 가능해 신속하게 피해금을 돌려주지만, 가상자산 거래소는 법적 근거가 없어 피해 회복이 어려웠다. 전기통신사기피해환급법을 보면, 피해자의 피해구제 신청이나 정보 제공·지급정지 요청·피해환급금 지급 등 피해 회복에 필요한 절차는 모두 금융회사만 가능하다. 가상자산 거래소는 현행법상 신속한 환급이 불가능한 상태다.
이에 경찰은 지난 4월부터 4개월에 걸쳐 2543개에 달하는 금융계좌에 대한 자금추적을 통해 피해자 503명을 특정했다. 또 이를 거래소와 적극적으로 공유해 이달부터 피해 회복 절차를 개시했다. 지난 21일엔 국내 5대 가상자산 거래소와 피해금 환급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심무송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 1계장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범인 검거보다 피해 회복이 더 절실하다”며 “수사 과정에서 피싱 피해금 환급의 제도적 문제점이 확인된 만큼 이를 조속히 보완할 수 있도록 관계 당국, 가상자산 거래소와 지속해서 협의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한겨레